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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화성능동·동탄·병점·오산 수험생보약 한의원 : 조선의 출셋길‘장원급제’ … 총명탕(聰明湯) (3)
    수험생 총명탕 2018. 8. 2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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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광의 나날 : 장원이 누린 온갖 혜택

     

     

    조선왕조에서는 장원급제자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우대했습니다. 문과 시험이 끝나면 방()을 붙여서 합격자를 발표하고, 급제자들을 위해 여러 가지 축하 의식이 베풀어졌습니다. 우선 경복궁 근정전 증에서 합격 증서를 주는 방방의(放榜儀)가 행해졌습니다. 임금이 용상에 앉고 문무백관이 늘어선 가운데 합격자들이 차례로 왕에게 사배례(謝拜禮)를 올린 다음, 합격증인 홍패(紅牌)와 어사화, 일산(日傘)(햇볕을 가리기 위한 큰 양산) 등을 하사받았습니다.

     

     

    방방의가 끝나면 의정부나 예조에서 행하는 축하연인 은영연(恩榮宴)이 시작되었습니다. 문무 대신들이 참석한 가운데 급제자들이 갑, , 병과 순으로 앉으면 풍악이 울리면서 기생들이 술을 권하고 광대들이 재주를 부렸습니다. 은영연이 끝난 다음 날에는 급제자들이 다시 대궐에 나아가 왕에게 사은례(謝恩禮)를 드렸고 그다음 날에는 성균관에 있는 문묘에서 공자의 신위를 참배하는 알성례(謁聖禮)를 치렀습니다.

     

     

    이러한 문과 시험의 절차와 급제자 발표, 각종 의식 등은 성종 때의 대신 양성지(梁誠之)가 알성시를 묘사해서 지은 악장 <친사문묘송(親祀文廟頌)>에 잘 나타납니다.

     

    이에 명륜당에 나아가

    곤룡포를 입으시니

    많은 유생이

    엄숙하게 대궐에 모였네.

     

    정승에게 명하여

    모든 유생을 시험하니

    신도 머리를 조아려 절하고

    예의를 갖추었네.

     

    선택이 정밀하니

    어찌 인재를 내지 못하리오.

    사람들이 다투어 머리를 모아

    충신이 되기를 원했네.

     

    난간에 임하여 방을 붙이니

    하늘의 해가 오색(五色)을 내리고,

    어사화와 일산을 하사하니

    하늘에서도 가갈(呵喝)했네.

     

     

    이러한 공식적인 의식이 모두 끝나면 급제자들은 요즘 말로 축하 퍼레이드 또는 시가행진이라 할 수 있는 유가(遊街)를 행했습니다. 급제의 기쁨을 친척이나 친구 등과 함께 나누는 의미인 유가는 대개 합격자 발표 후 3~5일간 행해졌습니다. 급제자들은 말을 타고 어사화를 머리에 꽂은 채 사내아이들을 앞세워 행진했는데, 이때 악대가 풍악을 울리고 광대가 춤을 추며 유희를 베풀었습니다. 유가는 급제자들을 격려하는 의미가 컸습니다. 서울에서 이러한 여러 가지 행사를 마치면 지방 출신 급제자들은 금의환향했습니다.

     

     

    고향에서는 바로 영친의(榮親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급제자들은 고향에 내려가는 날 그곳 수령과 아전들의 환영을 받으며 유가를 하고 향교에 참배했으며, 수령이 동헌에서 베푸는 연회에 참석했습니다. 나라에서 술과 악사를 내려주어 친척이나 이웃들과 함께 즐기는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고향에서 환영 행사를 열어 준 것은 급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해주려는 나라의 배려였습니다.

     

    파격적인 관직 제수

     

     

    문과 장원에게는 종6품의 관직을 곧바로 제수했습니. 6품은 중앙은 주부, 지방은 현감에 해당하는 관품으로 급제하자마자 현감직을 준다는 것은 엄청나게 파격적인 대우였습니다. 9품에서 6품까지 승진하는 데는 8~10년이라는 기간이 걸린다는 것을 감안하면 장원은 동기생들보다 그만큼 앞서간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현감은 작은 지방 고을 수령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요즘의 지자체장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막강한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한 고을의 행정권만이 아니라 군사권까지도 장악한 수령이었습니다. 게다가 재판권까지 있어 백성들의 생사여탈을 좌우하는 무소불위의 존재였습니다. 장원은 급제하자마자 이런 현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원은 지방의 현감직보다는 한층 영화로운 중앙청 요직을 곧바로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거의 장원들은 육조의 좌랑 등에 임용되는 자가 많았습니다. 장원에게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한 것은 선비들의 학업을 장려하고 현직 하급 관리들을 승진시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시험을 통과한 급제 수가 발령받을 수 있는 관직 수보다 많아져 대기발령이 많아졌지만, 장원급제자들은 인사적체 가운데서도 바로 중앙청 요직을 바로 제수받아 등용될 수 있었습니다. 선비들이나 부모들이 장원급제에 그토록 매달린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관리가 된 장원급제자들은 그 후 승진에서도 다른 급제자들보다 유리했습니다. 전체 문과 급제자의 당상관(임금을 알현하는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관리) 진출 비율이 일반 관료직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장원의 1/3 이상이 차관급에 올랐고 1/4 이상이 장관급에 올랐습니다. 정승급에는 20명 중 1명이 장원 출신이었습니다. 장원이 남다른 출세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장원급제자라는 이점, 유력한 명문거족이라는 배경, 그리고 그들 저마다의 능력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작용한 결과였습니다.

     

    또한, 장원급제자들에게는 정년이 연장되는 특혜를 누렸습니다. 조선 시대의 관리가 70세가 넘으면 오늘날의 정년퇴직이라 할 수 있는 치사(致仕)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치사를 하면 관리 명부에서 완전히 삭제되고 녹봉의 지급이 중단됐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정년퇴직 나이가 현재에 비하면 상당히 높은데 이것은 노인을 공경하고 오랫동안 나라를 위해 봉사한 관리들을 우대하려는 시대정신에 있었습니다.

     

    풍요로운 물질적 보상

     

     

    장원급제자들은 높은 관직과 요직에 임명하는 것은 물론 임금이 직접 곡식이나 말을 하사하는 혜택을 베풀었습니다. 쌀을 하사하고 집안이 가난하다고 하면 잔치를 할 수 있도록 궁중 음식에 관한 사무를 보는 사옹원으로 하여금 3일간의 잔치 음식을 보태주도록 했습니다.

     

    장원급제는 말할 것도 없지만 과거에 합격하는 것 자체도 매우 어려운 일이었기에 합격자 당사자만이 아니라 그 부모에게도 포상의 은전이 내려졌습니다. 세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나라에서는 정기적인 녹봉을 내렸고 세종 때에는 부친이 생존한 경우 작위를 내렸습니다. 부친의 작위에 따라 모친에게도 그에 상당하는 작위가 하사되었습니다. (계속)

     

    -정구선의 조선 출셋길 장원급제중에서-

     

    조선의 출셋길‘장원급제’ … 총명탕(聰明湯) (4)

     

    조선의 출셋길‘장원급제’ … 총명탕(聰明湯)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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