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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출셋길‘장원급제’ … 총명탕(聰明湯) (2)
    수험생 총명탕 2018. 8. 2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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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시험 출제부터 채점까지, 시험장 풍경

     

    공정성을 갖추기 위한 여러 가지가 시도되었습니다. 그런 임무를 맡은 관원들이 생소할 수 있으나 그런 직책이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알아두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험문제는 과거를 보는 날, 새벽 시험관들이 한자리에 모여 상의해서 출제했습니다. 기출문제나 명이나 청나라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 주상에 대한 문제는 제외했습니다. 대과의 초시는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했습니다.

     

    시험장을 감시하는 입문관(入門官)은 시험 당일 새벽에 문을 열고 기다리다가 녹명책(錄名冊)(응시자명부)을 보고 호명하여 응시자들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순조 때는 응시자가 너무 많아 시험 전날 저녁부터 호명하여 그다음 날 아침까지 입장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때 한 번 들어간 응시생은 시험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었으며, 시험장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 증명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증명서를 위조하거나 증명서 없이 난입한 사람들은 처벌되고 군역을 복무하게 했습니다.

     

     

    수협관(搜挾官)은 문밖에서 응시생들의 옷과 소지품을 수색했습니다. 책을 가지고 들어가다가 발각되면 응시생들은 최장 6년 동안 과거시험 자격을 박탈했습니다. 입장이 끝나면 입문관은 수험생들은 여섯 자 간격으로 떼어 앉혀서 서로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고 금란관(禁亂官)이 문을 잠가 잡인들의 접근을 막았습니다. 원활한 시험 시행을 위해 차출된 차비인(差備人), 잡인들이 시험장 내에 마구 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장내에는 대간(臺諫), 장외에는 의금부 낭관이 나누어 엄격하게 감시했습니다.

     

     

    시험장에서 쓸 시험지는 나라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응시생들이 각자 구입한 것을 사용했으며 시험장에 입장할 때 제출하면 관리가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권세가나 부호의 자제들은 시험관이 누구의 답안지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게 두껍고 질 좋은 종이를 사서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시험 기간이 도래하면 장안에서 물가가 올라가는 품목이 있었는데 종이, , 벼루와 붓 그리고 한약재였다.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서 가격은 올라가게 되는데 특히, 양반가에서는 총명탕(聰明湯)이라 하여 자제들에게 복용하게 했습니다. 권세 있는 가문이나 부호들의 자제들은 성균관 입학과 동시에 거의 한약을 달고 살았습니다. 그 이유는 너무 힘들게 생활하는 성균관 생활을 버티기 위해서는 정신력도 중요했지만, 그에 뒤따르는 체력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성균관 생활을 하면서 드러내놓고 복용하기는 쉽지 않아서 집안 가노들을 동원해 암암리에 전달했고 그 과정에서 성균관학관들은 알아도 모른 체했습니다. 그만큼 과거시험이라는 것은 권력과 부의 세습에 중차대한 역할을 했고 좋은 성적으로 등용되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후술되지만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란 것은 엄청난 혜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시험문제가 게시되면 응시생들은 답안을 작성하기 시작하는데 시험시간은 식년시(매년 치러지는 정기시험)와 증광시(왕실의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치러지는 시험)는 정해진 시간이 없었고 통행금지시각인 인정(人定)(10시경)까지 답안지를 내면 되었습니다. 당일에 합격자를 발표하는 알성시(임금이 성균관을 방문하여 유생들을 대상으로 치루는 시험), 정시, 춘당대시 등은 시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후기로 갈수록 시험 관리 차원에서 시험시간이 3시간 정도로 줄여졌습니다. 시험이 끝나면 종을 쳐서 알려 줬는데 이도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후에는 북으로 바꿔서 알려줬습니다.

     

     

    시험 도중에는 응시생들에게 죽과 술이 지급되었습니다. 응시생들의 시장기를 달래고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왕이 하사하는 것이었습니다. 답안 작성이 끝나면 답안지를 수권소(收券所)에 냈는데 수권관 두 명과 군졸 몇 명이 답안지를 제출하는 순서대로 받고 시험시간이 종료되면 즉시 포장(布帳)이나 멍석을 답안지 위에 덮었습니다. 종료 이후에 포장 위에 억지로 답안지를 던지는 유생도 있었지만, 그 즉시 그 답안지 위에 限後(종료이후)’라는 두 글자를 써서 낙방으로 처리했습니다.

     

     

    종료 즉시 모든 유생은 시험장 밖으로 내 보내졌습니다. 시험 종료 후에 뒷거래로 답안지를 받아주는 폐단이 생겨 수권소에 직접 제출하지 않고 대() 위에 던지게 했는데 대 위의 사방에 나무를 심고 노끈으로 얽어서 답안지가 굴러떨어지지 않게 했습니다. 제출이 끝나면 제출한 답안지를 100장씩 묶어 정리했는데 이를 작축(作軸)이라 합니다. 공정성을 위해 마감 안에 제출되어 포장 밑에 쌓인 답안지는 제출순서를 불문하고 한데 뒤섞어서 여러 시험관과 감찰, 수권관이 모두 모여 보는 가운데 군졸들이 일제히 작축하게 했습니다.

     

    조선왕조에서는 과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했는데 그중 하나가 봉미(封彌)입니다. 이는 답안지 오른쪽 끝에 응시생들이 이름, 생년월일, 주소, 본관, 사조(四祖) 등을 적고 이 부분을 접어서 보이지 않게 풀로 붙인 것을 말합니다. 이는 채점자가 응시생의 이름을 알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채점이 다 끝난 뒤 접은 부분을 펴서 성적을 발표하게 했습니다. 제도의 취지는 좋았지만, 조선이 폐쇄적인 문벌 신분 사회였던 만큼 시행은 유명무실했습니다.

     

    봉미 제도와 함께 과거시험의 부정을 방지하는 장치로 역서법(易書法)이 있었습니다. 역서는 답안지를 거둔 다음 서리가 답안 내용을 붉은 글자로 다시 쓰게 해서 응시생과 시험관의 결탁을 방지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이는 서체로 응시생을 구별하는 폐단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일부 시험을 제외한 모든 시험에 적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역서에도 서리와 결탁한 부정과 응시생 수에 따른 과다한 비용과 시간이 들어 조선 후기에 와서는 폐지되었습니다

     

     

    대과에서 초시에 이어 복시가 치러지고 이어 전시라 하여 임금이 내는 문제를 논술하는 시험이 있습니다. 전시는 당락을 결정하는 시험이 아니라 복시를 통해 뽑은 인원을 관리로 임명하되 그들의 성적 등급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시험이었습니다. 전시에는 당시의 장치 상황이나 민생 등과 관련이 깊은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여기서 출중한 실력으로 1등을 하게 되면 장원급제가 되고 왕이 관모에 꽂아주는 매화꽃으로 휘날레를 장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왕조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것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시험을 치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계속)

     

    -정구선의 조선 출셋길 장원급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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