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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출셋길‘장원급제’ … 총명탕(聰明湯) (1)수험생 총명탕 2018. 8. 19. 07:00반응형반응형
조선 시대의 과거시험은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어 시행되었고 문과는 다시 대과와 소과로 나뉘었습니다. 소과는 대과 응시를 위한 예비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생원·진사시 또는 사마시라고도 불렀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대과를 보통 문과라고 했습니다.
대과는 3단계 과정을 거쳐 선발 인원을 추렸습니다. 과거시험은 정기시험도 있었고, 왕실에 경사가 있을 경우 시행되는 시험도 있었으며, 왕이 지방 순방시 치러지는 시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하는 시험도 있었습니다. 시험이 치러지지 않는 해도 있었습니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국가의 정책 때문에 양반들은 무과보다 문과를 더 선호했습니다. 이에 따라 문과는 조선 시대 과거의 꽃이라 할 만큼 중요시되었고, 문과 급제는 곧 가문의 영광이며 사회적인 인정과 명예를 얻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성균관 수험 생활 엿보기
관료로 국가 조선왕조의 지배계급이던 양반들에게는 벼슬자리로 나아가는 것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고 그것이 인생의 최고의 목표이기도 했습니다. 관리 등용의 정규 통로인 과거가 중요시된 것도 이 때문인데, 이에 따라 교육도 과거 준비가 가장 중요시되었습니다.
대략 7, 8세가 되면 서당을 다니면서 소과를 위한 시험 준비를 합니다. 15, 16세가 되면 서울은 사학(四學), 지방은 향교에 들어가 5, 6년 동안 공부를 하고 소과에 응시했습니다. 이 소과에서 합격을 하면 생원이나 진사의 칭호를 얻고 성균관에 입학하게 됩니다. 성균관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문과(대과)에 응시해 이에 급제하면 비로소 관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각종 학교 가운데 서울의 성균관은 과거 시험공부를 위한 마지막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원칙적으로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는데, 기숙사 생활은 상당히 엄격한 학칙에 따라 규제되었습니다. 유생들의 공부하는데 들어갈 필요한 종이나 붓 등은 물론이고 식비도 모두 나라에서 대주었습니다. 말 그대로 국비 장학생이었습니다.
대신 300일 이상을 성균관에 거주하면서 출석을 해야 했습니다. 한 달에 2번은 밖으로 외출할 수 있었으며 300일 이상 출석하여 출석점수를 인정받으면 대과 초시 응시 자격을 얻어 성균관을 나갈 수 있었습니다. 즉, 소과를 합격한 사람은 성균관에 들어가 1년을 수학해야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균관의 아침 식사가 끝나면 그 이후부터 수업에 들어갑니다. 공부는 크게 2가지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경학이라 불리는 사서오경의 강독과 논술시험인 제술이었습니다. 학업성적의 평가는 여러 차례의 까다로운 시험을 거쳐야 했습니다.
전 시간에 배운 내용을 확인하고 오늘 배운 내용을 암기해 매일 치르는 시험, 열흘마다 치르는 논술인 제술시험, 매달 예조에서 관장해서 치르는 월례고사 같은 시험, 매년 의정부, 육조에서 주관해서 3월과 9월에 치르는 논술시험인 제술시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험결과는 연말에 합산되어 우수한 자는 천거해서 바로 등용하거나 문과시험을 볼 때 초시 면제 등과 같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감금당하다시피 하면서 틀에 박힌 생활을 매일 한다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노환을 핑계로 고향에 내려가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과거시험 시기가 도래하면 부모의 노환을 증명해 줄 허위 진성장(陳省狀)(지방 관아에서 중앙 관청에 올리는 보고서)을 받아 가지고 올라와 과거에 응시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하여 성종 때는 진성장을 받은 자는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관시(館試)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청탁을 받고 진성장을 발급하는 지방의 수령은 처벌하게 했습니다.
성균관은 타의 모범이 되는 곳으로 사제 간의 의리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군사부일체에 따라 스승에 대한 불손한 언동은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생들이 스승을 능멸하는 사건이 일어나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기숙사감인 장관생원이 너무 엄격한 기숙사 생활을 강요하자 기숙사감을 묶고 회초리로 때리고 구타했으며 다른 유생들을 선동해 모두 성균관에서 나가게 했습니다. 요즘도 교사를 구타하거나 욕을 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조선 시대에도 이런 학생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시대만 달라졌을 뿐 이뤄지는 일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처리하는 방법은 달랐습니다. 곤장을 치는 일은 당연했고 징역형을 내렸으며 과거시험 응시 자격을 영구 발탁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조정에 대한 도전이라 여겼으며 조선 시대의 유교 질서를 허물어뜨리는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계속)
-정구선의 조선 출셋길 ‘장원급제’ 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경희여울한의원 수험생·학생 보약(총명탕) 치험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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